스포일러 주의: 본 글은 『블루 아카이브』이벤트 스토리 『우리는 오컬트 연구회! ~학원의 불가사의와 고대 주문~』 및 『시라오 에리 인연스토리』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일본어 더빙 일화와 시나리오상의 괴리
에리가 낙제생인 이유는 그녀의 능력과 무관하다
캐릭터의 매력과 직결되는 설정과 행보에 보다 신중해야

블루 아카이브 신규 캐릭터 에리. 트위터를 유랑하던 중 에리의 일본어 더빙 일화를 보게 됐다. 에리를 담당한 성우 이마이즈미 리오나今泉りおな가 일본의 공식 매체 <블루아카 라디오!>에서 다룬 이야기이다. 리오나 성우는 에리의 대본을 받고서 어려운 용어(한자)를 많이 사용하는 대사가 많고 동아리의 회장이라는 점 등을 통해 의젓하고 멋진 억양을 떠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의 해석에 따라 녹음한 결과 담당자가 ‘이 아이는 낙제생(落こぼれ, 낙오자)이니까 더 바보같이 연기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해왔다는 내용이다.
한편 키보토스 라이브의 코너 중 하나인 <개발자 코멘터리>에서는 카스미의 일본어 더빙 관련 일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시나리오 라이터로서 출연한 남민철 작가는 카스미가 가진 특유의 매력을 살리기 위한 작업 몇 가지를 가볍게 소개했다. 그중에는 일본 성우가 녹음을 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한 가이드 자료도 포함되었는데, 이에는 캐릭터의 성격과 함께 목소리에서 어떤 매력이 느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적시되어 있었다.

게임 개발진이 일본의 서비스 담당 업체와 어떤 방식으로 협의를 진행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다만 위 사례는 캐릭터 더빙 과정에서 개발진이 일본 측의 관계자에게 연기 가이드를 송부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캐릭터 더빙이 카스미와 같이 라이터의 의견을 반영한다 가정하면 에리의 사례도 현장 감독이나 현지 업체의 독자 판단이 아닌 본래의 설계 의도라 해석될 수 있다. 이제부터 본론. 에리는 정말로 학교 수업도 못 따라가는 바보인가?
심리적 부담과 치명적 실수가 만드는 악순환
우선 에리가 낙제생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녀가 낙제생인 이유는 실기 시험 성적의 부진임이 명확하게 언급된다. 물론 작품상에서 실기 성적이 낙제의 유일한 요인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에리의 이론이나 필기시험 성적은 우수할 것이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기 시험 성적에 관해서는 이후 에리의 성격 이슈를 다룰 때 함께 이야기하도록 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선생과 오컬연의 첫 일정 ‘와일드헌트 미술관 투어’에서 에리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큐레이터였다. 단순히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미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초보자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예술 학원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이었을 가능성은? 혹은 오컬트와 관련된 작품에만 치중된 반쪽짜리 설명이었을 가능성은? 여러 의문이 들 수도 있겠으나, 에리의 이론적 우수성은 함께 있던 오컬연 멤버들의 대사나 태도에서도 강조된다. 당시 오컬연 멤버들은 에리에게 안내 활동을 맡기고, 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뒤로 물러난다.


이 외에도 흥미롭게 본 장면이라 하면 역시 정보관 정보 탐색 신이다. 이 부분은 작품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한나절 내내 도서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답을 찾아내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현실’이었다면 장기적인 학습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갑자기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시 에리와 동료들이 조사한 사안은 와일드헌트 예술학원의 주요 시설물을 연결하여 유의미한 형상이 도출되는가였다. 에리는 와일드헌트의 과거 자료까지 종합한 끝에 도시전설로나 언급되던 마법진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게임 속 이야기에서 너무 과하게 해석한 것 아니냐고? 게임 좋아하는 모모이가 게임 개발을 위해 학술관에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모모이야 미안해)
결과 에리의 학업 성취도가 부진한 이유는 결국 본인 주장대로 실기 시험 탓이다. 실기 시험장에만 들어가면 잔뜩 긴장해서 시험을 망치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두 번째 이슈로 넘어가자. 에리는 소심하고 낯가리는 성격인가?
에리가 숨기고자 했던 것은 자신 속의 불안감
선생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활기차던 아이가 같은 학과 학생들만 나타나면 갑자기 얼어붙는다. 특히 여러 팬아트에서 학우들에게 잔뜩 이쁨을 받지만 이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참는 에리의 모습이 자주 비춰진다. 과 내에서는 얌전하게 앉아있다가 강의 시간이 끝나면 사라지는 타입? 학교에서는 쥐 죽은 듯 있다가 밖에서 친한 친구들과 만나면 활기를 되찾는 성격의 학생으로 이해받는 듯하다.
특히 에리가 이런 성격이라는 근거로 그녀의 발언이 제시된다. 자신이 하하 웃고 다닌 것도 사실 본인의 상황을 남들에게 숨기기 위해 억지로 취하던 태도였다는 고백. 사실 난 해당 대사가 왜 위와 같이 해석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만…. 어쩌면 일본 버전 대사는 다소 다를 수도 있겠다 싶어서 확인해 보았으나, 최소한 해당 장면만 두고 봤을 때 우리말 버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우선 에리가 학우들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심리적 원인은 낯가림이 아니라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자격지심이다. 주변 환경 변화, 즉 평균 실력의 고점화에 의해 받은 심리적 압박. 심리적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 실력이 향상되지 않아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는 이야기가 반성실에서 다뤄진다. 에리는 이 슬럼프의 수렁, 연쇄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다. 본인의 실력을 반추하고자 과거 작품을 따로 모아 두거나, 일종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오컬트라는 분야에 손을 대는 등의 노력을 보여준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자 벗기를 부끄러워하는 원인 또한 심리적 위축 상태에 있다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에리는 마법 모자를 벗는 것을 발가벗는 것만큼이나 싫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단순 개그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챙이 넓은 마법 모자에 저 정도로 의존하는 모습이 에리가 처했던 상황과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 반대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상대 앞에서는 모자를 벗거나, 이를 두고서 농담도 치는 모습도 인연 스토리에서 등장하니 심리적 요인이 분명히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에리가 밝은 모습을 억지로 보여주며 숨기고자 했던 것은 ‘소심하고 낯가리는 성격’이 아니라, ‘남들 곁에 당당히 서야 한다는 조바심’을 숨기기 위함이다. 심리적으로 몰리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음에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점이 큰 매력이다.
참고로 인연 스토리에서는 긴장하지 않은 에리가 오컬트, 즉 타로 점을 활용해 어떤 식으로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가볍게 다뤄진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그림들이 최소한 작품상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아, 실제 그녀가 갖춘 기량 또한 준수한 것으로 예상된다. 쉽게 말해 실력이 좋음에도 본인의 기량을 뽐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와 장면들이 에리의 우수성을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에리는 뒤떨어진 바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개발진은 학생들의 매력을 보다 명확하게 어필해야 한다
이렇듯 작품상에서 에리가 보여주는 모습은 ‘학교 수업도 못 따라가는 멍청함’과는 명백하게 거리가 멀다. 낙제의 원인이 멍청해서인 것도 아니며, 하물며 화가로서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가 슬럼프에 빠진 이유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모습을 멍청하다는 표현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
정말로 제작진 측에서 의도한 에리의 캐릭터성이 ‘뒤쳐진 멍청이지만 올곧은 성격을 지닌 학생’이라면, 시나리오상에서 에리를 저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 되었다. 물론 ‘멍청한 캐릭터가 똑똑하게 해석될 리스크를 제거하는 작업’이라니 정말 웃기고 말도 안 된다. 고로 뱅드림의 코코로와 미사키 사례처럼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순수성 바보 행동으로 캐릭성 못 박기’ 같은 장치가 있으면 서로 편하지 않을까? 정말로!

글을 매번 쓰기만 하고 블로그에 올리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좀 더 완벽한 글을 써야 해...! 같은 느낌...?
산해경의 카구야, 데카그라마톤 2장 엔지니어 삼인방과 케이의 문답, 스나오오카미 시로코의 캐릭터성 등....
쓰다가 던진 글도 많네요. 언젠가는 올리겠지?
그래서 차라리 트위터에다 가볍게 떠든 뒤에 해당 글을 조금 손봐서 블로그에 게시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좋네요 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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