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본 글은 『블루 아카이브』메인 스토리 『Vol.3 에덴조약 편』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질병적 애착과 사회 구조가 낳은 폭력을 비난할 수 있을까?
에덴조약 편에는 사오리가 아즈사를 고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사오리는 쓰러진 아즈사에게 탄알집 3개 분량의 소총탄을 쏟아붓는다. ‘헛되다’를 끊임없이 되뇌는 사오리의 모습에는 광기가 서려 있다. 아즈사의 물음에 인지부조화가 온 것일까. 이후 그 광기에는 애증과 질투가 서려 있었음이 드러난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 그리고 홀로 행복을 거머쥔 것에 대한 질투. 이렇게 사오리의 행동 원리는 보통 애증과 질투로 해석된다. 당사자의 발언을 토대로 한 해석이니 의심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이 둘 만으로는 사오리의 행동 원리를 전부 설명하기 어렵다. 저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어째서 아즈사를 그냥 내치지 않았을까. 그녀의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감정은 겉 포장일 뿐이다. 그 본질에는 아이들을 향한 병적인 애착과 공포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감정은 사오리의 인생관에서 비롯된다.
애정과 공포가 뒤섞인 혼란형 애착
사오리는 빈민가 시절부터 생판 남이던 아이들을 돌봐왔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굶어 죽을 아이들을 끌고 다니며 소매치기 같은 생존 범죄를 가르쳤다고 한다. 보호받은 경험이 없는 사오리가 남을 챙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아이들을 책임지는 것에서 삶의 이유를 찾았다. 아이들은 사오리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오리는 아이들 없이 살 이유가 없다. 사오리의 의존은 아이들을 향한 왜곡된 애정 표현으로 드러난다.
구조적 폭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끝없는 내전으로 인해 붕괴한 아리우스 사회는 주민을 한계로 내몬다. 사오리는 이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폭력을 재생산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동생 같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오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폭력뿐이다. 그녀의 교육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거부하면 사회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사오리의 학대 행위가 구조적 폭력에서 비롯된 뒤틀린 애착이라는 것 정도는 다들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라면 사오리의 세계관에 베아트리체의 교육이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베아트리체는 끝없는 죄책감과 허무주의를 주입한다. 행복을 추구하면 더 큰 절망으로 되돌아온다. 헛된 희망을 버리고 체념하면 고통스러울 일도 없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동생들이 있다. 그 아이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지켜야만 하는 대상을 잃는 미래는 사오리에게 끝없는 공포로 다가온다.
이렇게 애정, 공포, 염세주의와 죄책감 같은 감정이 뒤섞인다.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것을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양가감정은 방치하면 반드시 마음의 질병으로 번진다. 결과적으로 사오리의 뒤틀린 애착은 보호와 의존, 학대가 뒤섞이며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졌다. 혼란형 애착군으로 정의되는, 전형적인 학대 부모이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과거 사오리는 목숨을 끊으려던 미사키를 저지한다. 이때 미사키는 ‘어째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원초적 질문을 던져오고, 사오리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덴조약 편을 통틀어서 사오리는 이 질문에 계속해서 답해 왔다. 사오리의 대사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너는 진실을 외면하고, 달콤한 거짓에 눈이 멀었다. 그 나약함이 널 패배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함께 고통받았을 텐데, 함께 절망했을 텐데!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이 세계에서, 너만 의미를 가지겠다는 것이냐!
이 대사들이야말로 미사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죽음은 거짓된 행복이다. 헛된 세상에서 희망, 행복, 그리고 죽음 따위의 거짓에 홀리면 패배할 뿐이다. 이 고통은 우리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만 하는 '죗값'이다. 사오리의 눈에 아즈사는 세상의 진실을 외면하고 불구덩이에 몸을 내던지는 아이로 보였다. 그랬기에 진실을 의심하면서도 끝내 아즈사를 놓지 못하는 집착을 보인 것이다.
결국 사오리가 아즈사를 끔찍하게 학대한 원인에는 질투보다 더 깊은 애정이 존재한다. 아즈사와 미사키를 포함한 아이들을 지키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했던 생존의 몸부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많은 의견 교환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적어도 이 수렁과도 같은 애정을 사법적 잣대를 들이밀며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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