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글에서는 나기사와 린 사이의 관계를 사회적·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둘의 관계를 주목한 계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서론과 결론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1장은 정치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작중 인물의 관점을 활용해 트리니티 종합학원과 키보토스 학원도시의 정치 갈등을 살핍니다. 저는 앞선 두 조직이 민주적 가치를 매우 잘 실현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제2장은 권한과 신뢰에 관한 것입니다. 총학생회장 권한대행이라는 특수한 직위를 통해 임시 권력이 가지는 한계와 사회적 관계를 살핍니다. 권한대행의 합법적 권한과 실제적 권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린 행정관이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또 이를 나기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통해 임시 권력의 본질을 분석했습니다.
이 글에 담긴 사회과학 지식은 불명확할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전부 집에 꽂혀있는 교양서 몇 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공도 기계 설계·제어 분야라서, 철학이나 정치학은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정확한 내용을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카르바노그의 토끼 편 2장까지의 내용을 일부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주의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메인스토리 『최종편』은 키보토스에 속한 여러 자치구가 총학생회와 직접 교류하며 협력하는 내용이다. 이 생소한 전개는 총학생회의 비상대책위원회 소집 요청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비대위 개최 소식을 들은 각 자치구의 반응을 보여주는데, 트리니티 티파티 멤버가 나누는 대화 내용이 제법 흥미롭다. 티파티 호스트인 나기사가 별안간 린 권한대행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막연히 나기사의 발언에 정치적 요소가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같은 스토리도 보는 사람마다 주안점과 평가가 달라진다. 나기사의 발언도 나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나기사가 버리지 못한 '나쁜 버릇'에서 불신이 비롯된다는 인식이 가장 흔해 보였다. 내 해석과 완전히 상반되지는 않는다. 그저 나기사가 가진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어감이 달라질 뿐이다. 고로 이런 문제에 정답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와 다른 의견을 봤으니, 막연할 뿐인 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 사람들이 나기사의 언행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에덴조약』 편에서 나기사가 보인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모습들이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타인을 믿지 못한 결과 보충수업부 학생들이 고통받았다. 선생이 직접 나기사에게 외친 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너는 구제불능의 의심암귀야!" 그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낙인처럼 남아 있다.
언급 대상이 나나가미 린 수석 행정관인 점도 한몫한다. 린은 그녀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기특한 학생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서류 업무가 서툰 선생을 도와주며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키보토스에서 처음 선생님을 맞이하는 학생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상대책위원회의 발족은 선생님의 부탁이 원인이다. 성실하고 선생님을 믿어주는 린과, 선생님을 포함한 모두를 믿지 않던 나기사를 비교하면 누구라도 린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요즘 서브컬처 게임은 스토리나 인물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 특히 블루 아카이브의 세계는 인류 사회 구조를 고등학교 시스템과 섞어 놓았다. 다뤄지는 내용에는 학생들의 청춘과 정치적 결사체의 권력 투쟁이 공존한다. 그러니 작품의 해석에도 사회적·정치적 시각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치 우리가 미술관의 작품을 볼 때, 화가의 가치관과 시대상 같은 요소를 두루두루 고려하듯이 말이다.
1장 정치의 구조

독사굴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2학년생이자 자유주의자(?)로 잘 알려진 우라와 하나코는 트리니티를 독사굴에 자주 빗대어 표현한다. 독사굴의 의미를 느끼기는 쉽다. 그동안 트리니티가 보여준 많은 모습이 바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독사 자체도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니, 그 독사가 몰려있는 굴에 대한 인상도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일본말로 읽기 복잡한 독사굴 대신 토리카스トリ滓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토리카스는 트리니티 쓰레기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독사굴은 '사악한 무리'를 가리키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독사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비난의 표현으로 널리 사용된 숙어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성경의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등장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가볍게 조사해 보니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쉽게 말해 독사는 겉으로 정의를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악의를 품은 타락한 존재를 의미한다. 쓰레기나 단순 악의 무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위선도 선인가?'라는 본질적 탐구는 제쳐두자. 여기서 핵심은 독사의 기만적 행태니 말이다.
에덴조약 편 2장 때 하나코가 보여준 회상 장면에는 여러 정치 단체가 등장해 활동한다. 정치 활동은 키보토스의 학생이라 해도 1학년에게는 부담이 크다. 하지만 티파티와 시스터후드를 비롯한 많은 조직이 1학년인 하나코의 우수성을 탐냈다. "저 티파티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만이…." 이렇게 그녀를 영입하려던 자들은 권력 투쟁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정치꾼으로써 파벌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갓 입학한 1학년생 조차 스카우트 하려 드는 모습에 사회적 명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의명분이 아닌 탐욕의 길을 걷는 정치판은 앞서 이야기한 독사굴이나 다름없다. 결국 '날것의 정치'에 너무나도 일찍 노출된 하나코는 트리니티 그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독사굴의 모습을 한 사회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회 공동체는 입체성을 띄고 있고, 독사굴의 모습은 사회가 보여주는 일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집단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원주의 사회가 보여주는 대표적 양상이다. 다원주의 사회는 서로 다르면서도 동등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한다. 굴 안의 독사들은 하나의 대의로 뭉치지 못하고 의견이 대립하며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 다원성과 복잡성이야말로 사회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이다.
대표적으로 트리니티의 행정 수반인 티파티를 구성하고 있는 세 파벌은 삼두정 협의체를 통해 협력과 견제 관계를 유지한다. 미소노 미카가 이끄는 파테르 분파는 나머지 두 분파 세력의 견제로 인해 강경 정책을 함부로 추진하지 못했다. 보충수업부의 건으로 폭주하던 호스트 키리후지 나기사와 필리우스 분파는 티파티 외부세력인 시스터후드와 구호기사단의 압박으로 인해 영향력이 축소된다. 이 밖에도 트리니티의 균형이 무너지려 할 때,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가 개입하며 저지된 사례는 많다.
결국 하나코가 거부한 독사굴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듯 보이면서도 트리니티의 내적 붕괴를 저지하는 방어장치이기도 했다. 끝없는 암투와 이중성으로 가득 찬 모습은 서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공화적 이상이 가지는 그림자다. 그렇게 하나코의 냉소는 역으로 트리니티가 다원주의적 협의 과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권력
정치라는 단어는 어느 시대이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20세기를 기점으로 민주 공화국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21세기도 여전히 정치는 냉소적 홀대의 대상이다. 정치란 무엇일까? 의미를 모르면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없다. 사전을 펼쳐보면 두 가지 내용이 나온다.
하나는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제도화된 권력을 행사해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우는 공공의 장을 의미한다. 나머지 하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이권다툼을 가리킨다. 이 경우는 적용 범위가 전자에 비해 훨씬 광활하다. 생존을 위해 각자의 권익을 확보하는 것은 생명체가 가진 본능이다. 인간 사회로 한정해도, 정치는 저 높은 국가 통치 기구부터 가정 속 밥투정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정치는 대의를 위한 헌신보다는 개인의 생존 투쟁에 가깝다. 사실 정치의 본질이 자기 이익의 극대화라는 해석은 시대를 관통하는 정설이기도 하다. 16세기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부터 20세기 한스 모겐소H. J. Morgenthau에 이르기까지, 이 시각은 ‘정치적 현실주의’로서 현대 정치학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실주의가 실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관련 서적을 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 도덕이 아닌 욕구로부터 비롯된다는 해석은 정말 현실적이다. 하나코가 바라본 독사굴의 모습과도 잘 어울린다. 파테르 분파의 친위 쿠데타 시도가 무산된 뒤, 각자의 이익을 위해 미카의 자택과 유치장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던 정치 세력들이 떠오른다.
이처럼 독사굴은 정치 투쟁으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본질적 이유를 잘 투영한다. 사회적 권리부터 정치적 허영심까지, 권력을 위해 도덕과 책임윤리마저 저버리는 혼돈의 장. 참고로 현실주의 학자들은 저런 식으로 정치를 정의하지 않았다. 독사굴은 그저 정치에 대한 냉소일 뿐이니까.
결국 권력은 사회에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권력의 외양에 취해 그 자체를 지향하는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결국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독사굴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모습만을 투영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듯, 대의에 대한 전적 헌신 없는 정치권력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내몬다.
권력을 지향하는 독사의 내면은 텅 비어 있다. 정치권력은 대의를 향하는 구성원의 지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목적과 수단이 반전되었으니 내적 허약함과 무력함을 권력의 달콤함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사굴은 생존의 투쟁이다. 저런 세력들은 독사굴의 이면에 존재하는 다원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공화주의의 가치에 짓눌려 사멸한다. 그리고 권력의 분산과 민의 반영이야말로 정치적 현실주의에서 강조하는 ‘현실’이다.
정치는 협상의 과정이라 해석하는 다원주의와 정치의 본질은 권력 투쟁이라 해석하는 현실주의. 이 둘은 서로 상반된 듯 보인다. 하지만 두 사상 모두 권력 투쟁이 대의와 신념 없이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간이 가진 불완전성과 사회의 불합리성은 우리 앞에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너무 단기적 현상에만 집중하지 말자. 하나코가 트리니티를 ‘독사굴’로 치부하고 자퇴를 시도하듯, 자칫 냉소적 허무주의와 민주적 무력감에 빠져버릴 수 있으니까.
제도
총학상회는 앞서 소개된 트리니티 종합학원을 비롯한 키보토스 전체를 총괄하는 행정 기구이다. 이 기구는 『카르바노그의 토끼』 편에서 그 조직 형태가 일부 공개되었다. 총학생회 밑에 통괄실과 행정위원회라는 두 조직이 수평적으로 존재하고, 행정위원회는 다시 11개의 전문 행정부서로 분과된다. 자세한 내용은 발키리 교정국에 수감되어 있는 시라누이 카야 씨에게 문의하자.
얼핏 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행정부 조직도와 비슷하다. 하지만 최종편 1장에서 그 인식이 뒤틀리는 사건이 전개됐다. 행정위원회에서 수석행정관에 대한 문책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린의 모든 권한이 일시 정지되는 행정 명령이 발동됐다. 보통 이런 절차는 행정 수반이 되는 수장의 권한이다. 각료들 사이의 결의만으로 다른 고위 관료의 권한을 정지시킬 수 있는 제도는 일반적이지 않다.
린에 대한 행정위원회의 판단이 타당했는가를 따지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 두자. 재무실장 오키 아오이는 결의안이 권력의 폭주 방지 목적임을 확실히 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총학생회가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감시하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제도와 절차에 따른 권력 통제와 감시는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배 권력은 정당성 없이 사회적 신뢰를 확보할 수 없다. 시대가 발전하며 국가 권력은 법률을 통해 합리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법률가들의 형식주의적 절차가 융합되었다. 이로써 제도와 절차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지배의 내적 조건으로 자리 잡게 된다.
지배의 내적 조건은 앞서 언급했던 막스 베버가 주장한 핵심 원리이다. 막스 베버는 총 세 가지의 순수한 형태-전통성, 카리스마, 합법성-가 서로 융합하거나 변형되며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합리적 제도와 절차는 합법성에 포함된다. 권력의 외향에 이끌려 권한대행 직을 찬탈한 시라누이 카야를 보자. 그녀는 지배의 내적 조건인 합법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 자리에서 끌려내려 왔다. 카야의 합리적이지 못한 행정 명령과 사회 감시, 그리고 내란 주도를 포함한 여러 불법적 행위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법과 제도는 합리성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있다. 총학생회 행정위원회가 가진 강력한 권한은 키보토스의 시민이 생각하는 합리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결국 이런 제도와 절차는 키보토스의 정치 지도자가 사회적 합의를 따르게끔 강제하고, 이에 어긋난 존재를 규탄하는 힘으로써 작용할 것이다. 만약 이런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독사굴에 내던져진 카야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2장 권한과 신뢰

대행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은 같은 대통령제 국가지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부통령副統領, Vice President과 국무총리國務總理, Prime Minister이다. 미국의 부통령은 흔히 대통령의 러닝메이트Running Mate로 표현된다. 평소 부통령은 상원의장직을 겸하며 행정 업무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원에서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능은 하지만 그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대신 부통령은 대통령이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직위를 승계받는다. 대통령이 복귀하면 직위도 다시 반납해야 하지만, 부통령은 그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 아닌 승계하여 행사한다.
키보토스 통괄실 수석 행정관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평시에 총학생회장을 보좌하고 회장의 정책 지침을 행정위원회로 전달하며 조율하는 고위직 행정 관료이다. 미 부통령과 달리 선거로 선출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정치적 대표성을 띄지도 않는다. 총학생회장 부재 시 권한을 대행한다는 점도 국무총리와 동일하다.
총학생회장과 행정 수석은 둘 다 정치 행정의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전자는 정치 지도자인 반면, 후자는 그저 정치 행정 관료에 불과하다. 정치 지도자는 대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회의 지지를 받아 정책을 결정하는 존재이다. 또한 정치가로서 정책 추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책임 윤리를 갖추고 있다. 이런 자질을 갖추지 못하면 카야처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그에 반해 정치 관료는 정치 지도자의 정책을 관료 조직과 의회에 전달하고 설득하는 기계적 역할을 담당한다. 관료에 대해 막스 베버가 설명하는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관료에게는 자신의 견해와 무관하게 합법적 명령에 따르는 도덕적 통제와 자기부정이 필수라고 한다. 내무 행정을 관리하는 각료 또한 정치적 지침을 대변하며 전문 관료를 통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그 미덕의 경계선은 많이 흐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위치와 입장이 지향하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수석 행정관의 권한 대행은 행정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절차에 불과하다. 고로 권한대행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가로서의 사회적 권한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명문화된 법률과 제도가 아닌 사회적 합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치 관료에 불과한 린에게는 정책을 대변하는 능력이 있을 뿐, 대의에 대한 헌신과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의 내적 조건인 카리스마를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작중에서 린이 당하는 여러 부당한 처우가 여기서 비롯된다. 린은 색채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비대위를 구성하고, 사회 체제의 전복을 노린 대기업 카이저에 대한 중징계를 건의한다. 이는 모두 총학생회장의 권한대행으로서 적법한 권리 행사이다. 그럼에도 린의 결단은 행정위원회의 문책 결의안이라는 형태로 돌아왔다.
린 스스로도 관료가 지니는 한계성을 인지하고 있음이 작중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열정과 안목으로 정책을 밀고 나아가야 할 정치 지도자의 자질, 즉 자기 확신을 정치 관료인 린은 갖추지 못했다. 린은 확실히 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전문적이고 성실한 학생이다. 하지만 그녀가 카야 방위실장과 나눈 대화에서 내적 무력함이 드러난다.
“제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권위를 내세워 타인을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저도……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데…….”
그토록 우수한 린이 총학생회 내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그 결과 키보토스가 역으로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보는 모두를 분개하게 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린은 자신을 따라주지 않는 주변이 아닌 총학생회장의 부재에 힘겨워한다. 합법적 권한과 합리성에만 집중하며 린이 뒤집어쓴 사회적 오욕을 해석해선 안 된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되는 응원은 거꾸로 린을 정치권력의 환경으로 내모는 괴롭힘이 될 뿐이니까.
양심
린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한다 해서 그녀에게 닥친 불합리한 상황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현실의 불합리성은 때로 최선의 선택을 거꾸로 탄압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법과 제도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게 린은 규탄받고 타의에 의해 권한 정지와 복구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처럼 사회는 불완전하다. 그러니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이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린이 권한대행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청렴과 결단력을 믿고 따르는 많은 학생들이 그러하다. 린이 조금 힘들더라도 그녀에게 정치권력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실제 키보토스에 닥친 여러 재앙급 위기를 피해 간 것은 린의 판단력이었다.
하지만 정치 관료에게 지배권을 쥐어주는 상황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자질의 차이도 이에 포함된다. 정치인이 가져야 할 자질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했으니 실제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알아보자.
조금 찾다 보니 1986년 기예르모 오도넬Guillermo O'Donnell과 필립 슈미터Philippe C. Schmitter의 전환 정부에 관한 연구를 발견했다. 이 연구는 권위주의 국가가 민주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전환 정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조금은 결이 다른 듯하지만, 전환 정부와 대행 정부 둘 다 정치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 관료들의 합의를 통해 운영된다는 점이 일치한다.
이런 임시 통치 기구는 보통 임명직 행정 관료와 전문 기술관료, 즉 엘리트들의 합의에 의해 운영된다. 엘리트 합의체는 필연적으로 관료제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을 증폭시킨다. 무사안일주의가 저변에 깔린 관료집단은 행정 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또한 임명직으로 이루어진 합의체는 사회의 의견을 반영하지도 못하며, 민주적 정당성 또한 갖추지 못한다. 이미 총학생회는 린의 의지와는 별개로 점차 악화되고 있다. 작중 구체적인 사례가 제시되진 않지만, 크로노스 보도국의 방송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총학생회가 너무 무능한 거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생텀 타워는 최종 관리자인 총학생회장이 실종된 뒤부터 이미 유명무실한 상태였잖아요? 그러니까 없어진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도 없을걸요?”
연구진은 임시정부가 단기적으로는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는 역할에 적합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빠르게 정상 체제로 전환하지 못할 경우 민주적 정당성과 사회적 신뢰가 훼손됨을 경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실제 라틴 아메리카나 동유럽의 사례를 비교분석 한 내용을 포함한다. 신속한 선출직 체제 전환 여부로 민주주의의 이행 성패成敗가 갈렸다고 한다.
린의 우수성을 잘 아는 우리와 키보토스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입장이 다르다. 린이 관료 조직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린의 강제력 행사는 앞서 말한 다양한 요소로 인해 그녀의 입지를 위협할 뿐이다. 린은 실종된 총학생회장이 돌아올 때까지 행정 안전에만 최선을 다하는 길을 선택했다. 다행히도 이 길은 선생의 조력으로 인해 그나마 안정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만약 선생이 없었다면, 총학생회장을 포기하고 빠르게 보궐선거를 개최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양심에만 의지하기에는, 정치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복잡한 미로와 가파른 산맥의 연속이니 말이다.

신뢰
현재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정치 지형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우선 오랜 기간 티파티의 한 축을 담당하던 파테르 분파가 자멸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던 종교 조직 시스터후드가 정계로 진출했다. 정치권력을 스스로 거부하던 구호기사단 역시 티파티의 의사 결정에 관여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티파티의 폭주가 원인이다.
티파티 내부 알력軋轢이 극심해진 결과, 호스트 유리조노 세이아가 테러에 휘말렸다. 호스트 자리를 이어받은 나기사와 티파티의 정치적 폭주는 트리니티 전체를 위협하게 된다. 정책 추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심증만으로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일부 학생의 학적을 말소하려 든다. 키보토스에서 학적 말소는 현실의 국외 추방보다 훨씬 무서운 개념으로 묘사된다. 이 폭주에 휘말린 보충수업부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 바로 에덴조약 편이다. 저 무서운 과정이 밝혀지고서 티파티의 사회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그들이 제도와 절차를 무시한 결과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재 트리니티의 정점에는 여전히 티파티가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의심에 휩싸여 어둠 속을 헤매던 나기사 또한 호스트로서 굳건하다. 한 번 무너져 내린 신뢰를 다시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기사가 티파티를 다시 바로 세우는 과정은 여러 이벤트 스토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티파티의 정통성을 홍보하기 위해 수백 년 전의 문화유산을 공개하거나, 티파티 협의체에 외부 독립 조직을 참가시켜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독사굴로 묘사되는 트리니티에서 나기사는 티파티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런 사실은 그녀가 가진 정치적 수완의 우수성을 증명한다. 나기사는 지배의 내적 조건인 정통성과 합법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전부 확보하기 위해 움직인다. 사회적 절차와 합의, 그리고 신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며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최종편에서 이런 모습과는 상반된 장면이 등장한다.
트리니티 내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 총학생회로부터 공문이 티파티에 전달된다. 선생의 요청에 의해 이상 현상을 조사하던 린이 비상대책위원회 발족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를 수령한 호스트 나기사와 세이아 간의 대화 장면이 재미있다. 다음은 나기사와 세이아가 차례대로 번갈아가면서 주고받은 대사의 일부이다.
“총학생회가 비대위 개최를 선언했네요. 몇 년 만이지…….”
“선생님이 총학생회에도 그 꿈의 내용을 전달했다고는 들었지만…….”
“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 총학생회가 움직이진 않을 텐데. 저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을지도……. …저는 총학생회장이 사라진 후의 총학생회를 신뢰하지 않아요. 대행 나나가미 린 씨는 무해한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을 수 없어요.”
“네. 지금 총학생회는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어차피 이 모든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논의할 필요는 있어요. 그게 이 기회라고 생각하면 거절할 필요까진 없겠죠.”
나기사는 에덴조약 사태를 계기로 신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또다시 총학생회와 린 대행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나기사는 과거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일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 학생이라 성장 과정의 미숙함이 드러난 것일까?
사실 여기서 신뢰는 정치적 신뢰를 가리킨다. 해당 발언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현재 총학생회는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엘리트 합의체로 운영되는 조직은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조직이 아니기에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정말로 중대한 위기가 발생해 총학생회가 움직였다면 그것대로 문제다. 대행 체제는 위기 대응을 위해 중장기 정책을 논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행 체제 자체가 혼란 방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임시 조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책 결정에는 반드시 상호 이해관계가 엮이기 마련이다. 현재 총학생회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나기사는 총학생회가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할 주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이아도 이를 인정하며 총학생회가 아닌 다른 세력과의 논의를 강조한다. 실제로 린의 목적은 본인의 정책을 자치구에 하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자치구가 모여 키보토스에 닥친 미증유未曾有의 위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에서 그쳤다. 린은 우수한 행정 관료이기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현재의 총학생회는 자치구 간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나기사 또한 그런 무해한 린을 정치적 협의 대상으로서 신뢰하지 않는다. 에덴조약을 최초 발의하고 추진했던 것이 실종된 총학생회장임을 기억하자.
“트리니티와 게헨나가 체결하는 조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 학원 자치구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본적으로 자치구의 책임. 총학생회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나기사의 대사 하나만 배치하고 보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게임의 대사 출력 형식이 의도치 않은 해석으로 이어진다. 나기사는 개인의 편견과 미성숙이 남아 있는 학생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나기사와 린의 입장을 정치·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보니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생겼다. 그리고 대화의 흐름과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 나기사의 발언이 담긴 진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대사 한두 줄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고 얼마나 돌아서 와야 하는지! 그래도 이제 결론을 짓자. 나기사는 린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며
블루 아카이브는 굳이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스토리 전개에 꼭 필요한 만큼만 볼 수 있다. 일부러 감추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치가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국가 조직의 원리를 잘 모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궁금증을 곧바로 해소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키보토스에 존재하는 행정 조직의 구성을 조사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정보의 파편을 모아 현실 제도에 빗대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키보토스에는 분명히 양원제 의회가 존재한다. 대책위원회 편 1장에서 호시노가 이를 언급했다. 총학생회와 의회는 무슨 관계일까? 행정위원회는 의회가 추천해서 구성되는 조직일까? 아니면 총학생회장이 임명하는 걸까? 하지만 행정위원회의 독립된 권한은 과거 군주정 시절의 행정 관청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총학생회장은 사실 선출직이 아닌 군주일지도 모른다. 키보토스는 군주정이 입헌주의를 도입하며 공화정으로 바뀌던 과도기의 모습일 수도 있다. 수석 행정관 또한 단순 임명직 각료가 아닌 정치적 계승권을 가진 존재일지도? 하지만 모른다.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잔뜩 보인다. 그럼에도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블루 아카이브가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들고 시장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낯설지만 그 윤곽은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현실의 정치와 사회 제도, 권력의 집중과 분배 과정으로 게임 속 세상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물며 우리는 낯설게 설계된 키보토스의 전체 구조조차 모른다. 하지만 총학생회와 티파티 모두 복잡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지닌 정부 조직이다. 이 게임은 사회 구조의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개념만 가져와 스토리를 풀어내지 않는다. 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사건의 전개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선생과 학생들이 강조하는 가치는 작품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모두와 함께 힘을 합친다.” 이는 하나의 뜻으로 획일화되는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가 아닌 화합과 공존의 가치를 품은 다원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런 ‘힌트의 파편’을 모아서 스토리를 해석해 보자. 그냥 게임 속 세상 이야기로만 받고 넘기는 것보다 보이는 것은 많아진다.
다원성, 합의, 신뢰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인물들을 움직이는지 잔뜩 분석해 보자. 나기사는 트리니티의 행정 수반이 갖춰야 할 자질을 보여준다. 린은 행정 관료가 갖춰야 할 신념을 관철한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기사는 그냥 남을 의심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학생일 뿐이며, 린은 아둔한 부하들 사이에서 고통받는 무력한 학생일지도 모른다. 파고들며 생각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했을 때 얻는 결과가 사실인지 알 방법은 없다. 그래도 사탕을 받았는데 포장에만 감탄하는 것은 아깝다. 그러니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자. 포장만큼이나 알맹이도 분명 맛있을 것이다.
그러니 작품이 낯설게 하기 위해 넣은 철학과 사상의 개념에, 작품을 친숙하게 만드는 정치 구조를 버무려서 열심히 해석해 보자. 그러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깊은 해석의 결과에 도달한다. 고로 나는 이렇게 결론 내겠다.
나기사와 린 사이에 존재하는 불신의 벽은, 사실 그들이 속한 사회 구조를 통해 발현된 믿음의 증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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